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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1997년 11월 26일 (수) 오후 12시-4시...
장소 : 한강시민공원 노들레스토랑...
대담 : 김창완 vs 박준흠 / 사진 : 이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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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자체가 계획에 없는 거죠"

............................박준흠 : 방송활동, 특히 연기활동도 꾸준히 하고 계신데요, ..........................연기 활동은 원래 계획에 없지 않았나요?
..............김창완 : 인생 자체가 계획에 없는 거죠.
...................................그러면 앞으로도 달라질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일
....................................례로 요리사가 된다든지, 카 레이서가 된다든지...
.....................그거는 모르죠.
.......................................이번 회의 제목이 "산울림 : 미국에 루 리드가
..................................... 있었다면 한국에는 김창완이?" 인데 루 리드를 거
.......................................론 해서 어땠습니까?
......................저 그사람 곡 <Walk On The Wild Side>를
....................좋아해요. 요새는 <Perfect Day>,<Pale Blue Eyes>같은 곡들이 히트곡이 되었고요. 근데 희한한게 루 리드와는 일원한푼 거래가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연결을 해 놓은 사람이 있으니 말이죠. 이번 기사의 타이틀을 보고 놀랬습니다. 제가 루 리드를 좋아한다고 소문 낸 적도 없었는데.

사실 루 리드를 모를까봐 걱정도 했었습니다. <Walk On The Wild Side>이면 1972년 Transformer에 실린 작품이군요. 그 당시는 대학생 시절인데(김창완 : 71학번) 그때부터 루 리드를 좋아했나요?
그 당시는 C.C.R, 닐 영의 <Heart Of Gold같은 곡을 좋아했어요.
루 리드를 김창완씨와 비교하면서 거론한 이유는, 루 리드는 60년대 말부터 미국 내에서도 주류 음악권에 있지 않으면서 시대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을 했었고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철저히 변방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시대를 이끌어 가는 사람 중 하나라는 무시못할
사실은 이기 팝이 펑크의 대부(Godfather of Punk)라는 칭호를 얻었듯이 그도 60년대 말 벨벳 언더그라운드 활동으로 뉴욕 펑크의 시조가 되었고 이후의 런던펑크, 그런지, 얼터너티브 록을 개화시킨 장본인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마찬가지로 산울림도 국내 대중음악사에서 그런 역할을 했던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앞 세대에 신중현씨도 있었고, 키보이스, 히식스같은 밴드들도 있었지만 록 음악을 대중화시킨것은 산울림이 시발점이 되었던것 같습니다. 앞 세대 로커들과도 음악적으로 상이했고요. 이런 점에서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산울림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일례로 1집에서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에서의 피아노 라인과 기타 솔로, 그리고 전체적인 그루브감은 그 당시 국내 대중음악 환경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차별적인 사운드인 것 같은데요.
산울림이 처음 나왔을때 파격적이라는 평가들이 있었고요,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것,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등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산울림 음악 자체의 질을 떠나서 새로운 사고가 가능하다는 것이 중요한것 같아요. 작곡할 때도 생각했었던 것들은 "사랑이 떠나가서 슬픈 사람이라면 눈물이 먼저 나오지 어떻게 '내 사랑 떠나갔네'하고 노래를 부를까"라는 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노래는 진한 감정이 배어있는 노래가 별로 없어요. 산울림 노래들은 상당히 객관적이면서 대상으로부터떨어져 있는것을 견지했어요. '사랑'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용되기까지는 8집까지 기다려야해요. 그 당시에 감정적으로 처리하기 힘든 무거운 주제같은 것들은 피해 갔어요.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것들을 노래하려면 노래 이전에 다른 행위들이 먼저 있어야 할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산울림의 노래를 듣고 '아무것도 아닌 얘기를 어떻게 저렇게 할까'라고 봤을 것입니다. '비닐 장판위에 딱정벌레가 가는데 그걸 어떻게 노래할까'등.. 반대로 우리는 '사랑이 떠나가는데어떻게 저렇게 노래할까'라고 생각했어요.

"산울림 초기라는 것, 그 자체가 상당히
복합적이면서도 추상적이예요."

거의 모든 산울림 곡의 가사가 두 번 이상 반복되는데, 특별히 가사를 대중에게 전달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나요?
당연지사로 생각했지 반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노래가 두 번 들려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반복적인 리듬이나 리프는 좋아해요. 요새 사람들이 싫어할 것 같지만 그래도 앞으로 할 거예요. 저는 같은 리듬이 나오면 안정감을 느끼는데 사람들 중에는 상당히 불안하게 듣는 사람도 있어요. 변화가 없는것에 대한 두려움이죠.
혹시 60년대 싸이키델릭 음악에 관심이 있었나요? 그 장르의 특징 중 하나가 반복적인 것과 장시간의 곡 구성인데, 약물 문화의 영향 탓인지 20분씩 되는 곡들도 있고요.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In-A-Gadda-Da-Vida>같은 곡이요?
산울림 리프도 그런 쪽에서 영향을 받았나요?
영향이야 받긴 받았죠. 특별히 좋아했던 건 아니구요.
앞으로 나올 음반은 산울림 초기사운드로 돌아갈 수도 있을것 같습니까?
돌아가기가 어려워요. 나도 못 돌아갈 뿐만 아니라 청취자들도 돌아갈 수가 없어서.
그러면 자신의 음악을 한다는 것과 대중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경계선은 어디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음악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
니죠.
방금전에 산울림 초기 사운드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라고 하셨는데, 이는 대중이 안 받아줄 것이라는 판단 하에
자신이 내부적으로 경계를 정한것이 아닌가요?

산울림 초기라는 것, 그 자체가 상당히 복합적이
면서도 추상적이예요. 산울림 초기라는 것은 초
창기에 나온 워크맨과 같을 거예요. 초창기 워
크맨은 만들 수 있지만 누구도 사질 않잖아요.
밥 딜런의 새 앨범을 들어보더라도 우리같은
사람들에게 회한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았고,
앞으로의 나의 행위도 그럴 수 있겠죠.




"그렇게 어색한 합주는 이 세상에서 아직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초기 음반 이야기로 돌아가서, 1-3집에서 보여 준 사운드메이킹의 독특함, 일례로 김창완씨의 퍼지톤 기타사운드와 김효국씨의 오르간 연주 등은 어떻게 구
.............................상한 건가요?
..................김효국이요? 그런 사람 난 몰라요.
...................................그럼 그 당시 오르간 치신 분은 어떤 분이죠?
.....................김난숙이라고 사촌동생이예요.
.....................................산울림 1-3집 사운드의 가장 독특한점은 오르간이 기
................................... 타와 아주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는데요.
......................걔는 악보 없으면 못 쳐요. 한 음도. 필(feel)
..........................(이 없어요. 악보를 그려 주면 고대
.......................... 로 치는 거예요.

.............................................그러면 오르간 사운드의 아이템도 김창완씨가
........................................... 제시한 거겠네요.
..........................그럼요. 요새같이 연주자가 알아서 치는
...................... 것도 아니고.

.........................................그 분은 필이 없으셨다고 하셨는데요, 그래도 1-
....................................... 3집의 결정적인 사운드 요소는 오르간이었던 것 같은데.................................은데요.
...............................하도 괴상하게 치니까. 그런 소리를 내는 오르간 연주자가 어디 있어요? 그렇게 어색한 합주는 이 세상에서 아직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하여간 이상하게 쳤어요.
그럼 1집에서 끝나야지 왜 2, 3집까지 계속 같이 했나요?
아니 그래도 3집에서 들어 보면 알겠지만 오르간이 없으면 허전하지 않나요?
허전한 정도가 아니라 산울림 사운드가 아니겠죠. 정 어색했다면 사운드를 바꾸라고 하든지 다른 연주자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으셨나요?
...
산울림의 초기 사운드 같은 경우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특별히 어디서 영향받은것 같지 않던데요.
산울림의 초기 사운드의 오리지널리티는 일본 사람들도 인정하고요. 하지만 어디서 기원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원래 남의 말을 잘 안 들어서 그런건지.
산울림의 경우 데뷔 20일만에 스타가 된 경우인데, 원래 스타를 꿈꾸지는 않았겠죠? 그리고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된 기분은 어땠나요?
사람들이 왜 그러나 했죠.

꼭 맞는 비교대상은 아니지만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 같은 경우 원치않는 성공에 고민하다가 자신의 음악을 더 이상 할 수 없음에 자살을 했는데, 김창완씨는 갑작스런 성공에 어떤 느낌을 받았나요?
조금씩, 조금씩 적응해 나갔죠. 그래도 10년쯤 지나니까 나도 연예인인가보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70년대 대학가요제 출신 그룹들의 사운드 기조는 산울림의 그것을 계승한 측면이 있는것 같은데요.
산울림이 영향을 주었다기 보다는 대상을 받은 샌드페블즈가 영향을 주었겠죠. 악기 편성도 그렇고.
일부 음악 평론가들은 대학가요제를 공권력에 의해서 기획된 행사로 보기도 하는데, 마치 80년도 '국풍 80'처럼요. 유신 말기 정권에 대한 사람들의 증폭된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함이 대마초 파동으로 허전해진 대중음악계의 빈 자리를 채우려는 방송사의 전략과 맞아 떨어진 결과물일수도 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주로, 샤프, 작은 거인, 마그마라는 주목할 만한 밴드들이 탄생되었고, 산울림과 함께 이들은 록 음악의 대중화를 이루는 역학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겠죠. 70년대 말 가요계 상황은 이미자, 송대관등 트로트가수들이 그때까지도 세를 형성하고 있던 때였고, 분명히 산울림, 대학가요제 그룹들은 다른 이질적인 존재들이었죠. 이들이 없었다면 이후의 대중음악 판도도 달라졌을 것 같아요.

록 그룹 자체가 대마초 사건 때문에 궤멸이 되고 청년문화가 특별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대학가요제가 생겼다는 것 때문에 상당히 정치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고 봐요. 그때 수 많은 대학교에서, 단과 대학에서도 자기네들끼리 학교 가요제를 열지 않았습니까?

"세 살때 보던 세상이나 지금 볼 수 있는 세상이나
그때 모르던 것은 지금도 모르겠고,
그때 아는 것은 지금도 알겠어요."

개인적으로 산울림 사운드의 정수라고 생각하는 2집에서의 압권인 <이 기쁨>의 폭발적인 사운드와 정석적이지만 유려한 기타 솔로를 들으면 타고난 음악인이 아닌 이상 철저하게 음악을 준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나름대로의 수련과정이 있었습니까?
71년부터 음악을 했으니까 2집 낼때면 7년간의 기간이 있었네요.
혹시 타고난 감각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천재는 안 가르쳐줘도 알고, 안 배워도 행한다고 한다는데.
글쎄 천재라고 하니까 말하기가 거북한데, 사실 원래 천재성이 있었어요. 사물을 보는게 어렸을때부터의 훈련이기도 하겠지만 사물을 보는 관점이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었어요. 음악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음악을 대하는 방법, 음악을 만들어 가는 과정도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천재성이라면 천재성일 수 있겠죠. 그건 오래된 습성이에요. 획득된 것은 아닌 것같아요. 기억 나기 전부터 그렇게 보였던 것 같아요. 세 살때 보던 세상이나 지금 볼 수 있는 세상이나 그때 모르던 것은 지금도 모르겠고, 그때 아는 것은 지금도 알겠어요. 그러니 그 당시 천재라고 그랬겠죠.
혹시 음악적인 절정기가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최근에. 13집.
13집에서 <FAX 잘 받았습니다>라는 곡을 보면 가사에 "인터뷰 내용을 미리 알려주시면 시간이 절약이 될 겁니다"라고 쓰여 있는데 기자들이 인터뷰 준비를 제대로 해 오지 않아서 괴로운 적이 있었나보죠?
아니, 오해입니다. 전에 일본인이 인터뷰해왔을때의 상황이었습니다.

예전에 다른 인터뷰에서 8집을 안 좋게 생각한다고 하셨는데, 8집은 <새야 날아>같은 깔끔한 곡들이 실린 음반이 아니었나요?
물론 좋은 곡들이 실렸죠. 안 좋으면 그 음반이 많이 팔렸겠습니까? 7


 

 

집은 재기작이었고 8집은 산울림의 롱런을 약속하는 음반이었지만 여기 배어 있는 철저한 상업성 등이 질색하는 바이죠. 지금 앨범 13집도 이만한 정도의 소구점을 파악을 하고 기획을 탄탄히 하고 흐름을 이 정도로 만들어 냈으면 보다 성공작이 되었을 거에요.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어떤 건가요?
개구장이 앨범을 포함하여 동요집 세장입니다.
산울림 정규 음반보다도 마음에 든다는 말씀입니까?
그럼요. 산울림 정규 음반 중에는 9집이 마음에 듭니다. 내용이나 진
실성이나 간절함이나.

'간절함'이라뇨?
간절함은 내부적인 것일 수도 있고 여건일 수도 있고. 그것은 작업한 사람의 비밀일지도 몰라요. 9집 할 때는 거리낌이 없었어요. 8집의 성공으로 편안한 마음이었을 수도 있고.

"영원한 펑크가 있죠. 펑크는 그 당시 섹스 피스톨즈가
나와서 생겨난 일도 아니죠."

70년대 상황으로 돌아가서요. 70년대 음악을 이야기 할 때 한대수, 김민기, 이주원, 양희은, 송창식, 정태춘, 조동진을 거론하면서 청년문화와 연관을 시키는 시각도 있는데, 김창완씨는 약간 뒤지기는 하지만 동시대에 음악을 했던 분으로서 당시의 포크 음악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 것 같은데 이유가 있었나요?
그 당시 그 사람들을 잘 몰랐어요. 사람들이 그들이 유명하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지 난 그 사람들이 유명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 쪽 음악은 전혀 안 들었어요. 그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평가받는지 관심도 없고요. 그리고 김민기 씨는 그 부분에 대해서 확실히 거부의사를 밝혔는데 왜 사람들이 물로 늘어지는지 모르겠어요.
그 당시 국내 음악인 중 좋아했던 사람은 없었나요?
신중현, 김추자, 펄시스터즈를 좋아했어요.
산울림이 활동했던 초반기는 유신 말기의 시대적으로 암울했던 시기였고 문화계 전반을 포함한 사회 전반이 억눌리고 탄압받았던 시기였는데 왜 산울림은 시대 상황과 무관한 음악을 했고 사회 현실 발언에는 무관심했는지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당시에도 탄압받지 않았습니다. 누가 탄압받았다는 겁니까? 그 시대 전체를 탄압받은, 마치 자신이 탄압의 목표물이 됐던 것처럼 설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봅니다. 남의 아픔이 진정한 내 아픔이라면 그들이 과연 노래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쓸데없는 탁상공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남의 아픔이 진정한 내 아픔이라고 생각한다면 노래를 하기 이전에 현실참여를 해야한다는 말씀인가요?
순서가 어찌 됐건 다만 그들같지는 않았을 겁니

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라는 대상이 참 궁금하네요.
그리고 시대 구분을 그렇게 무 자르듯이 할 수는 없죠. 70년대는 어땠고, 80년대는 어땠고 그렇게 가를수는 없어요. 마치 그 당시에 무슨 시대 정신이 있는 양 말하는데 그 시대에는 항상 온갖 것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활동하던 가수들은 이런 사람들이어야되고 이런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그 당시에 적합한 인물이었으며 등등.. 말이 안됩니다.
예전에 이야기했던 '통념'에 대한 거부를 말씀하시는거네요. 산울림 데뷔음반이 나온 1977년은 영국에서 섹스피스톨즈 데뷔 음반이 나오는 것을 기점으로 런던펑크가 폭발한 시점인데 동시대에 음악을 했던 사람으로서 펑크 뮤직을 보는 시각은 어떤가요?
같은 시기에 섹스피스톨즈 데뷔 음반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놀랬는
데 그것은 일
본원숭이 예를 들 수 밖에 없군요. 일본 원숭이는 패러다임에 많이 인용됐는데 한쪽 지역에서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먹는 원숭이들이 생겨났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다른 섬에 있는 원숭이
들도 고구마
를 바닷물에 씻어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그 당시 섹스 피스톨즈와 펑크는 보도 듣도 못했습니다.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안정된 나라의 젊은이들과 상당히 정치적으로 불안한 나라의 젊은이들이 어떤 연유로 동시에 비슷한 행위를 하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음악에 끼치는 외부 환경의 미약함을 반증하는것이 아닐까요.

섹스 피스톨즈는 구미의 대중음악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장본인이고 90년대의 얼터너티브 록-팝 펑크를 이야기 할때 반드시 거쳐가는, 그래서 울궈먹을대로 울궈먹은 사람들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그랬겠죠.
펑크 컬처는 90년대에 우리나라에서까지도 재생산되었는데, 일례로 패션이라든지, 클럽가라든지...
아주 종합적이고 도발적인 문화를 한마디로 말하자니까 부담스럽고 언어가 적합하지 않네요. 그 단어를 인플레이션 시키는데, 정말 개인적으로는 거지를 동경해요. 사회가 정교하게 짜이면서 근본적인 욕구가 짓눌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욕구들이 삐져 나가요. 70년대 우리 사회는 삐진 싹이 보이면 싹둑 짤라 버렸는데, 그것도 매일 아침 면도했죠. 지금은 조금 삐죽 나와도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지만. 그런데 인간적인 잠재욕구를 누가 잠재울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펑크가 있죠. 펑크는 그 당시 섹스피스톨즈가 나와서 생겨난 일도 아니죠. 세상이 그 사람들을 계속 거세하는데도 그네들이 상당한 인구증가를 기록하여 사회적인 문제가 되면 집시 죽이듯이 죽이겠죠. 아니면 그네들한테 학력을 제한해서 돈을 못 벌게한다든지 하면 도태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 욕구가 없어지겠습니까? 지금 나도 있는데.
그러면 산울림같은 경우도 70년대 상황에서 잠재욕구의 표출로 탄생된 것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우리가 받아들여진 이유는 대중한테 잠재적인 욕구가 해소되는 듯한 착각이나 적어도 그러한 것들을 불러일으킨 것 때문이었을 겁니다.
산울림 존립 타당성에 대한 가능한 답 같습니다. 또한 70년대 말이면 마이너적인 펑크가 있었던 데 반해 전세계적으로는 디스코라는 장르가 휩쓸고 있었는데, 이 장르를 산울림 음악에 흡수하는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나요?
산울림이 할 수 있는 곡은 춤곡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디스코는 춤곡이고요. 산울림은 다분히 문학적이며 철학적인 음악을 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니까 우리도 그런가보다라고 여겼어요.


"솔직히 저는 산울림의 음악과도 상관 없어요."

어떤 스타일의 영화를 좋아하십니까?
장르 구분 없습니다. 아마 '제5원소'는 보다가 잤죠. 아휴 정말 깨더라고요.
유럽 영화 스타일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합니다. 제라르 드 파르듀가 나오는 '세상의 모든 아침'을 좋게 보았습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 얼굴 샷만 5분정도 나오는 영화도 재미있게 본 적이 있어요. 표정이 계속 바뀌면서 눈을 깜빡거리니까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어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올리브 나무 사이로 걸어가는 '올리브 나무 사이로', '현 위의 인생'같은 영화도 좋아합니다. 진짜 예술가들을 좋아합니다.
스스로는 예술가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든, 안부르든 앞으로도 행위를 할 거니까요. 돈을 주어도 하고, 안 주어도 하고.
예술가의 정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 심지어 못해도 하는 사람. 프로는 아무리 못해도 꾸준히 하는 사람.
자신에게 신선한 음악은 어떤 것입니까?
서양 음악은 기본적으로 신선하지 않아요. 뭔가 내게 자극을 주지 못해요. 아마 묘한 새로운 분위기에서 시타 연주를 듣는다든지, 아라비아의 어느 거리에서 환상 속의 묘령의 아가씨가 지나갈 때 코브라를 춤추게 하는 피리소리에 뻑이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음악적인 경험을 앞으로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국내 대중음악에서 신선함을 느낀 적이 있었나요?
아니요.
그럼 마이너 성향의 음악은 좋아하십니까?
요새 펑크 밴드들의 음반은 다 좋아합니다. 언니네 이발관, 성기완, 크라잉 넛, 황신혜밴드, 어어부밴드를 좋아합니다.

80년대의 헤비메틀과 90년대의 얼터너티브 록은 들었나요.
아니요.
거의 이런 장르와 상관이 없나보죠?
솔직히 저는 산울림의 음악과도 상관없어요.
무슨 말씀인가요?
내 음악하고 나하고 어떻게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인세를 나한테 준다고 해서 상관이 있는 건가요?
음악은 감정의 표면화고 그 감정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죠. 속지 마세요. 내 마음과 반대로 했었을 수도 있고, 내 마음을 되도록이면 안 들키려고 썼을 수도 있고, 물론 어떤 것은 정말 내 마음이 북받쳐서 썼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글을 쓰는 순간 상당히 나로부터 일탈한다는 느낌입니다. 원래 내 감정이 이거라고 해서 감정을 농축해 들어가지만, 내감정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람들의 감정을 이렇게 쓰면 비슷할 것이라 집작하고 작업에 들어가죠. 이미 작품은 나와 결별하기 시작한거죠. 그게 나와 작품과의 관계입니다.
모든 아티스트한테 적용되는 이야기입니까?
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에 관하여, 감정에 관하여, 이상에 관하여, 철학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 얘기에 찬성합니다.
수용자 입장에서는 작가와 결과물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요.
작품을 만들 때 창작자 입장이면서도 수용자의 태도가 반영됩니다. 그래서 작품 자체가 나로부터 괴리됩니다. 내가 작품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작품은 작가의 투영정도겠죠.

"다만 그게 음악이 아니라 다른 추억거리다라면
간직할 수도 있죠."

전에 목적 자체가 없는 마음의 산물은 1-3집에 불과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나머지 작품들은 목적이 나름대로 있는 상태에서 만든 것입니까?
목적이야 돈을 번다든지, 시간을 번다든지 나름대로 있었죠. 1-3집은 곡들이 71년부터 미리 써진 상태에서 출반했기때문에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었겠습니까? 녹음하는 데 의미가 있었죠.
그러면 20대 초반에 써진 곡들이 1-3집에 실린 거겠네요.
아니죠. 5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기때문에 17살에 대학교 1학년이었고, 그러니까 10대 후반에 쓴 곡들이었죠. 창훈이는 15살 때 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음악적 재능은 타고 난거네요. 앨범 커버의 그림들은 애들 그림을 직접 선택한 건가요?
아니요. 애들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그려요. 음반 작업이 끝난 후 앨범 콘셉에 맞게 직접 그렸습니다.
음악 감상 태도가 이래야 된다라는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산울림 음악은 이렇게 들어야 된다라든지.
있죠. 듣기 싫으면 끈다. 영원히 안 들을 꺼면 판을 깬다. 억지로 갖고 있을 필요는 없죠. 다만 그게 음악이 아니라 다른 추억거리다라면 간직할 수도 있죠. 음악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현재 앞으로 나올 작업을 하고 계십니까?
작업 중이라고 봐야죠.
곡을 지금 쓰고 계십니까?
머리 속으로만 구상중입니다.
장시간의 인터뷰에 응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산울림의 맏형인 김창완은 지금 그들의 14집을 준비중이며, 또한 꾸준히 방송 활동
(라디오 디제이, TV 드라마 연기자)도 병행하고 있다.

 



<아니벌써>의 스트레이트한 리듬으로 중무장한 채 대중음악계에 출사표를 던진 산울림의 데뷔 음반이 나온 지 20년이 경과되었고 이 음반은 그들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향후 음악판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당시(현재까지도?) 국내 대중음악의 아킬레스건인 '음악을 위한 음악'인 삶에서 전혀 체화되지 않은 가사들의 '나열'과 급조된 사운드에 불만을 느낀 대중에게 그들은 신선한 경험을 가능케 했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도식적인 단어로 표현하는 것을 지양하는 그들을'선각자들'이라고 칭하는데 별 하자 없을듯 하다. 70년대 초반 김창완이 대학생 시절에 만들어 놓은 곡들로 구성하여 만들어진 그들의 '혁명'적인 이 음반은 한국 대중 음악사에서 한 시기를 접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메가폰의 역할을 하였다.


1집 / 서라벌 레코드사 / 1977 수록곡은 <아니 벌써>,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꺼야>, <불꽃놀이>, <문좀 열어줘>등이고 굳이 곡 해설을 할 필요가 없는 기념비 그 자체인 음반이다.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꺼야>의 그루브감은 지금 들어도 놀라움의 도가니임.
여러가지 의미에서 섹스피스톨즈의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에 비견되는 작품.

2집 / 서라벌 레코드사 / 1978 1집의 성공을 업고 1집 음반이 나온지 불과 5개월 후에 발매되었다. <어느날 피었네>, <이 기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안개속에 핀 꽃> 등 산울림의 놀라운 곡들이 배치된 최고작. <어느날 피었네>의 도입부를 들어 본 사람이라면 노착지근하게 감겨오는 멜로디의 비범함에 감동을 받을 것이고 정말 '비오는 날이면 무슨 꽃이 필까 지켜설 수' 있게 될지도 모름. 또 <이 기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에서 들려주는 멜로디컬한 헤비함에 가슴이 미어짐.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LP가 지글거리도록 들어도 물리지 않는 작품.

3집 / 서라벌 레코드사 / 1978 김창훈의 위악적인 보컬이 독특한 <내마음(내마음은 황무지)>가 담긴 초기 산울림의 마지막 작품이며, 이 음반을 끝으로 김창완의 두 동생 김창훈, 김창익이 군에 입대. <그대는 이미 나>는 20여분의 러닝 타임으로 당시 화제가 됐던 노래이고 산울림은 이 작품까지 그들의 실험 성향을 드러냄.


5집 / 서라벌 레코드사 / 1979 <오솔길>이외는 특별한 느낌을 주지 않음.

11집 / 대성음반 / 1986 달라진 산울림의 모습은 앨범 뒷 커버에서도 드러남. 혼자 앉아 있는 김창완의 모습은 산울림의 상태를 시사하는 바가 큼.

6집 / 서라벌 레코드사 / 1980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빨간풍선>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작품. 그 외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 <찻잔>이 수록되어 있음.

12집 Adagio / 서울음반 / 1991 오랜만에 활동을 재개한 작품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는 곤란함.

 

7집 / 대성음반 / 1981 김창완의 두 동생이 군에서 제대 후 다시 뭉쳐 만든 재기작. 사운드의 기조가 초기에서 완전히 탈 바꿈된 작품. 고풍스러운 오르간이 빠지고 퍼지 톤 기타 사운드도 없어졌다. 느낌은 깔끔해졌지만 초기의 거칠면서 원초적인 에너지를 기대하기는 힘듬. <가지마오>, <독백>, <청춘>등이 히트하지만 이 작품에서의 핵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닐지. 세련되어진 기타웍이 일품.
13집 무지개 / 지구 레코드 / 1997 삼형제가 다시 모인 작품. 예전의 산울림으로 돌아가려고 고심한 앨범.
8집 / 대성음반 / 1982 김창완이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작품이지만 분명히 7집에서 바뀐 사운드가 안정적으로 정착된 작품. <새야 날아>의 청명한 연주는 <내게 사랑은 너무 써>, <회상>과 함께 기억되는 트랙임. 상업적인 성공도 함께 거둬 후기 산울림의 대표작으로 여겨짐.
The Complete Regular Recordings In 1977-1996 / 지구 레코드 / 1997 8장의 CD에 1집에서 12집까지 모든 곡을 수록하고 각 CD의 마지막 부분에 미발매 라이브 곡과 데모 곡들을 수록한 '산울림의 역사'.
9집 / 대성음반 / 1983 김창완이 가장 좋아하는 산울림 작품. 사운드가 전반적으로 무거워지면서 다양한 경향의 작품이 수록됨. <웃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어>, <멀어져간 여자>같은 곡은 달라진 사운드를 대표함. <더, 더, 더>와 같은 멜랑콜리한 곡도 있지만 <TV도 끝났어요>같은 드라이브감이 느껴지는 기타 연주가 실린 곡도 있음. <황혼>은 신촌블루스가 2집에서 리메이크 함.

postscript / 서울음반 / 1995 김창완의 개인 작품. 산울림은 아님.

 

4집 / 서라벌 레코드사 / 1979
초기에 보여주었던 에너지가 상실된 음반.
10집 / 대성음반 / 1984 산울림의 종언. 사실상 산울림의 공식적인 활동이 중단됨. 이후 <숨길 수 없네>, <너의 의미>같은 멋진 곡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됨.
노고지리 2집 / 서라벌 레코드사 / 1979 김창완이 앨범 전체를 기획, 연출, 작사, 작곡한 사실상 산울림의 다른 버전. 산울림 6집에 수록된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 <찻 잔>이 있고 <찻 잔>은 대단한 히트를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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